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길모 굴리엘모 (문단 편집) === 인천교구장 시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영명축일.jpg|width=100%]]}}} || || '''인천교구장 시절''' || 나 주교는 교구장에 취임하자마자 신설 교구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한 복음선포 사업에 중심을 두었다. 당시 인천교구는 [[박문초등학교]],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었으나, 동구 화수동에 있었던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인천대건고등학교|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새 출발을 시켰다. 운영권이 [[http://www.notredame.or.kr|노틀담 수녀회]]에 있던 박문학교와 달리, 대건학교는 교구 직속에 두면서 [[미국인]] 교장(조셉 기본스 신부)을 임명하고 철저하게 미국식 [[사립학교]] 체제를 도입하여 학교 수준을 매우 끌어올렸다. 1966년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가 사회 참여에 돌입하는데 본격적인 계기가 된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이 일어나자 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1970~80년대의 독재시기 때도 이어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수원교구]]장과 [[광주대교구]]장을 역임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안동교구]]장 [[프랑스인]] [[두봉]]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이름을 떨친다. 특히 인천교구가 당시의 신흥 공업지역이었던 [[인천]], [[부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사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또한 인권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노동자 사목, 양심수 석방운동, 독재 투쟁 활동 등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인해서 당시의 정권에서 요주의 인물로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교구장으로서 [[인천교구]]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초기 9개 성당과 약 23,000명의 신자들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를 은퇴 시에는 10배 정도 확장시켰다. 현재까지도 인천과 부천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 비율이 높은데, 이는 나 주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4월 24일 교구장직을 은퇴하였다. 은퇴 시에도 여러 가지 기록을 만들었는데,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에서 남아있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이었으며 '''41년간 교구장직을 수행하여''' [[주교#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단일 교구 최장 임기 교구장]] 기록을 세웠다. 나 주교의 은퇴는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가 그동안의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교회 운영에서 완벽하게 독립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었다. 후임 교구장으로는 부교구장이었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승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